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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진으로 남겨진 역사의 진실

성수농원 2008. 3. 8. 15:38

사진으로 남겨진 역사의 진실


전  대  열

(한국정치평론가협회 회장)


황진이나 이매창 같이 아름다운 시를 남긴 기생의 이름은 영원히 전해지지만 불행히도 그들의 아리따운 모습을 담은 사진은 없다. 그 당시에는 사진이 발명되기 전이어서 대개 초상화로 전해지는데 과문의 탓인지 그들의 초상화가 실존하는지 여부는 모르겠다. 신사임당이나 허란설헌 같은 분들의 모습 역시 알 길이 없다. 남원에 가면 춘향이의 사당이 있는데 유명 화백이 그린 초상화가 있지만 상상속의 인물이니 거론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근대에 들어와 사진을 남긴 여성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는 누구일까. 그것은 말 할 것도 없이 고종의 정비였던 민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민비는 드물게 보는 여걸로서 격동하는 조선조 말에 대원군과 권력 다툼을 벌이며 외교적인 기교를 발휘하다가 일본정부의 묵인 하에 일본인들에 의해서 처참하게 죽어야 했다.

그의 생전의 모습이라는 사진 한 장이 전해져오는데 진위여부로 논란이 분분하다. 초상화도 없으니 어느 누가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 있겠는가. 역사란 이처럼 실증하기가 어렵다. 비록 기록으로 남은 것 중에서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잘못 기재되어 있기도 하고 기록자의 의중대로 꼬부려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번에 서울대에서 근대사를 강의하는 이태진교수가 매우 의미있는 사진 몇 장을 공개했다.

그것은 1896년 고종이 평복에 갓을 쓰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던 모습으로 알려졌던 사진이 실은 1907년 7월22일 덕수궁 내의 돈덕전에서 찍은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돈덕전은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무늬가 기둥과 난간 등에 장식된 멋진 건물인데 1920년대 초반에 일제 총독부가 헐어버려 지금은 볼 길이 없다. 아마 옹졸한 일제가 대한제국의 황실 상징인 오얏꽃 무늬가 맘에 들지 않아 헐어버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고종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특사를 파견하여 일제의 침탈을 호소했다고 해서 왜놈들로부터 퇴위를 강요당할 때였다.

이를 거절한 고종과 황태자(순종)를 대신해 환관 2명을 대역으로 삼아 엉터리 황제 양위식을 치르게 했다. 천인공노할 만행의 현장이 일본군대의 무력시위 장면과 함께 생생한 모습으로 험악했던 그 날을 증명하고 있다. 이 사진은 일본 학습원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는 1910년 통감부에서 발행한 한국사진첩에 실려 있다.

말하자면 아관파천 이후 11년이나 지난 후에 찍혀진 사진이다. 그런데 그 사진이 어찌된 셈인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해 있던 모습으로 잘못 알려져 온 것이다. 이 사진에 나타난 고종의 모습은 창문을 통하여 일본 군대가 시위하는 장면을 내려다보는 것으로 그 착잡한 군주의 심정을 누구라 헤아릴 것인가.

1905년 이미 을사늑약을 강요당해 외교주권을 빼앗긴 처지였기 때문에 사실상 형식상의 군주로 남아있었다고 하지만 외국군대가 남의 나라 임금의 퇴위를 강요하는 무력시위를 한 것은 약소국가의 설움과 울분을 함께 느끼게 한다.

외교주권을 뺏긴데다가 퇴위까지 강요당하고 있는 임금이 독도를 시마네 현으로 일본정부가 편입시켰을 때 아니라고 항의할 수 있었겠느냐 하는 당시의 딱한 처지를 생각하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얼마나 허위적인 것인지도 단박에 알 수 있다. 하물며 임금을 교체하는 황제 양위식에 스턴트맨처럼 대역을 쓰는 넌센스를 연출한 일본이 무슨 양심이 있는 국가인지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그들이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을 사진이 증명하고 있다.  


출처 : 낙송의 집
글쓴이 : 낙송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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