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흔적을 찾아서] (51) 산 넘고 물 건너 동해로 갔던 길 |
절벽 곳곳엔 철쭉이 영혼 적시는 맑은 길 |
/ 글사진 이재호 기행작가 |
2007/04/19 035면 09:18:56 |프린터 출력 |뉴스 배달서비스 |
신문왕은 어디로 산을 넘었을까?
신라 31대 신문왕은 아버지 문무왕의 뒤를 이어 681년에 즉위한다. 다음 해 동해 바닷가에서 만파식적을 얻는 기묘한 일이 벌어질 때 동해로 행차한 길은 어디였을까? 지금 가는 최단거리인 보문단지, 덕동호 지나 추령터널로 가는 길은 높은 추령고개를 넘어야하기에 수레 타고 가는 왕이야 갈 수가 없다. 최근에 만든 석굴암 위에서 장항리로 빠지는 길도 수레가 넘기는 불가능하다. 정면통과가 안되면 우회하는 수밖에 없다.
삼국유사에 신문왕이 갔던 길의 단서가 하나 나온다. 동해 바닷가에서 만파식적을 얻고 궁성으로 되돌아갈 때 '도지림사서계변(到祗林寺西溪邊), 유가주선(留駕晝饍)' '지(기)림사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했으니 이 시냇가와 연결되는 길만 찾으면 된다. 덕동호에서 북동쪽으로 가면 이곳과 마주친다. 암곡동 무장사지 넘어가는 길과 추령터널 못 미쳐 왼쪽 추원마을 안쪽 모차골 길일 것이다. 암곡동은 너무 우회하니 아마도 추령터널 왼쪽 추원마을이 최단거리가 될 테다.
추원마을 쪽으로 혼자서 길을 나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울산대 정민자 교수 일행이 동반자가 되어주었다. 싱싱한 신록이었다. 끝없이 산골로 이어지는 모차골 계곡에는 축복의 봄이 움트고 있었다. 승용차가 들어갈 수 있는 막다른 길까지 갔다. 막다른 곳, 간판도 없는 조그마한 절이 핏기없이 일행을 반겼다. 스님도 어디 갔는지 찾아볼 수 없고 대신 도화꽃만 붉은 부끄러움을 토하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지은 오두막 세 채 가운데 그나마 한 채는 판자로 대충 엮어 놓았지만 그럭저럭 낭만이 흘렀다. '운명상담'을 직업인지 큼직막하게 써놓았는데, 대웅전 안에 있어야할 부처는 보이지 않고 '프라임 영한사전'만 눈에 띈다. 이런 깊은 산골에서도 영어를 해야 운명상담이 될까? 다시 개울 건너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늦은 오후라도 나 혼자면 기림사까지는 가겠는데 일행들을 데리고 깊은 산골을 넘기에는 무리였기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
다시 산 넘고 물 건너
매달 우리 땅의 옛 길을 찾아 걷는 ㈔우리 땅 걷기회원들의 4월 기행이 마침 경주로 정해져 이사인 내가 안내를 맡았다. 첫날은 깊은 울림을 주는 원원사지, 괘릉 , 신문왕릉, 효공왕릉을 기행한 뒤 우리집 수오재서 짐을 풀고 곧장 뒷동산 솔밭으로 올랐다. 서산에 넘어가는 석양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해는 성숙하게 농익어 선도산을 사랑으로 물들였고, 우리네 가슴도 수줍은 흥분으로 가슴을 적셨다. 해는 정확하게 선도산 마애불을 스치며 안고 넘어갔다.
그 다음날엔 이틀 전에 왔던 추원마을 길로 다시 접어들었다. 큰 차가 들어갈 수 있는 데까진 차를 타고 가려 했지만 워낙에 걷는 것을 더 좋아하는 회원들이라 추령터널 입구에서부터 걸었다. 이틀 전보다 잎은 더 초록으로 물들어 온통 신록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개울 건너 살갑게 붙어있는 외딴집은 눈물 도는 정겨움이었다. 그리운 주막집 같았다. 한참을 걸어 길옆 약수터에 쉬면서 목을 축였다. 탄산음료처럼 톡 쏘는 물맛이었다. 이제 찻길 좁은 길도 끝났다. 부산차 울산차가 몇 대나 있었다. 부산 사람들은 운명상담 중이었고, 울산 사람들은 개울가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개울 옆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봄날에 꽃 피고 새 울고 나비도 춤추었고 계곡물은 흘렀다. 신록의 나뭇잎에서 배어나오는 부드러운 연두색이 어쩜 저리 고울까. 온통 초록인데도 촌스럽지 않은 이 자연의 위대한 조화에 나는 또 겸손을 배운다. 초록색으로는 아무리 뛰어난 색의 마술사들이 색을 낸다한들 촌스러움을 벗어나지 못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첩첩산골 두메산골이었다. 옛날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아른거린다. 순박하고 착했을 산골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런 두메산골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함께 공존한다. 물에 흠뻑 젖은 시커먼 버들은 여름이고, 갈대 억새밭은 가을이요, 낙엽 소복이 쌓여있음은 겨울, 그리고 산천이 움트는 지금은 봄이기 때문이다. 그런 운치도 못느끼는가 싶어 일행들을 향해 감성없는 '이과형(理科形)' 이라고 놀리자 모두들 소복이 쌓인 낙엽 위에 드러누워 일어날 줄 모른다. 세상 어느 침대보다 푹신했다. 나는 현실에서 수많은 무릉도원을 보았다. 나에게 무릉도원은 문화유적과 어우러진 자연의 조화였다. 지금 이런 골짜기도 도화 흐드러지게 핀 무릉도원이었다. 2시간쯤 걸었을 때 성황당 고개 마루에 올랐다. 멀리 동해바다가 꿈결같이 아른거렸다. 옛사람들은 얼마나 이 고개 마루에서 마음과 땀을 식혔을까? 내리막길로 접어들어 다시 수레가 넘었다는 수렛재를 넘어 마침내 기림사 뒷길과 맞닿았다. 일연 스님도, 매월당 김시습도 이 길을 수없이 걸으며 무엇을 느끼고 생각했을까?
용은 하늘로 승천하고
기림사 쪽으로 내려오자 계곡과 물이 심상찮다. 위에서 보는 폭포도 장관이었고 아래서 보는 폭포도 장관이었다. 푸른 물은 시린 아름다움을 흘리고 있었다. 폭포 왼쪽 바위 절벽에 붙어 흐드러지게 만개한 철쭉꽃은 '절정의 타이밍'을 연출하고 있었다. 장쾌함과 고요함이 어우러진 용연이었다. 대왕암 동해 바닷가에서 피리를 얻고 용으로부터 검은 옥대를 받은 신문왕이 여기서 여장을 풀고 점심을 먹을 때 태자 이공(뒷날 효소왕)이 기뻐서 달려왔던 바로 그 길을 다시 밟았다. 용에게 받은 검은 옥대가 그 자체로 용이라며 한쪽을 떼어 이 물에 담갔더니 곧바로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고 그 자리는 못이 되어 용연(龍淵)이라 불렀던 곳이다.
3시간30분을 걸었는데 아무도 배고파하거나 피곤하지 않았다. 지난 가을 함께 왔던 기림사 종광 주지스님이 알려주었던 고란초는 윤기를 잃고 있어 마음이 아렸다. 발길을 기림사로 돌렸다. 온통 연밭을 만들어 달 뜨면 차를 마시고 음악회를 하는 종광 스님의 꿈의 결실이 하나하나 이루어지는 것 같아 즐겁다. 기림사는 부처님이 가장 오랫동안 머물며 설법을 많이 베푼 기원정사(祇園精舍)의 '기'와 옛 임정사(林井寺)의 '임'을 따서 만들었다. 대적광전의 문살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목탑지 앞에 있던 큰 보리수나무는 쓰러져 보이지 않았다. 물 한 모금만 마시고 유물전시관에서 연산군 7년(1501)에 종이로 만든 건칠보살좌상과 고려 초의 불두만 급히 보고 내려왔다. 나는 기림사 일주문에서 휘어져 내려가는 이 길이 안동 봉정사 우화루 앞의 짧은 직선 길보다 몇 배나 운치 있는 아름다운 길이라 생각한다. 우화루 길이야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란 영화를 촬영할 정도로 절경이긴 하지만, 기림사 길은 이 곳을 오르내리는 마음 맑은 사람의 영혼까지 적시는 아름다운 길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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