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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백률사

성수농원 2008. 8. 19. 22:11
[삼국유사 흔적을 찾아서] (29) 법흥왕과 백률사
나라 위한 불교 공인, 삼국통일 '거목'을 얻다
/글.사진 이재호 기행작가
2006/11/09 035면 09:44:34   |프린터 출력 |뉴스 배달서비스

사진 설명:젖무덤처럼 다소곳한 모습의 법흥왕릉. 저 작은 무덤 속에 불교를 공인하고,금관가야를 병합해 삼국통일의 초석을 다졌던 법흥왕이 누워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 23대 법흥왕이 대궐 자극전에서 등극할 때 "옛날에 한(漢)나라 명제가 꿈에 감응하여 불법이 동쪽으로부터 흘러들어왔다. 과인이 제위에 오르면 백성을 위해 복을 빌고 죄를 없애는 장소를 만들고자 한다"고 소리 높여 외쳤으나 신하들은 새로운 불법을 믿고 절을 세우려는 왕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억장이 무너진 왕은 "아아! 과인이 부덕하여 대업을 크게 이어받아 위로는 음양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아래로는 뭇 백성들의 즐거움이 없어,정무를 보는 틈틈이 석가의 교화에 마음을 두고 있으나 누구와 더불어 일을 처리 하리오?"하고 한탄했다. 이렇게 국론이 크게 대립되면 왕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조율해 나가는 신하가 있어야 왕은 소신껏 국정에 임할 수 있다. 목숨 받쳐 이 역할을 이차돈이 했던 것이다

이차돈을 희생시켜가면서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의 능으로 갔다. 오늘 따라 가을 날씨가 변덕을 부려,하늘은 맑았으나 바람은 거세게 불면서 간간이 비도 뿌린다. 들판에 추수의 흔적이 여기저기 보이고 법흥왕릉을 오르는 길에는 이미 성숙한 가을이 가득했다. 조금 오르자 예사롭지 않은 소나무들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참 멋있게 쭉쭉 뻗었는데 오묘한 모습까지 하고 있어 내 눈과 마음이 설빃다. 지금은 햇빛이 쨍쨍하지만 좀 전의 비로 물기를 머금고 있던 소나무들이 반갑다고 물방울을 후두둑 후두둑 떨어뜨려 내 옷깃에 짜릿한 입맞춤을 했다.

# 큰 키에 너그럽고 후한 법흥왕

법흥왕릉은 선도산 서쪽 산골짜기 야트막한 산속에 숨은 듯이 비스듬히 누워 있다. 긴긴 소나무에 비해서 능은 40대의 예쁜 젖무덤 같았다. 이 예쁜 젖무덤을 만지지도 오르지도 못하고 주위만 천천히 맴돌았다. 벌써 11월 중순으로 접어들어 잔디도 갈색 물을 들이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여기는 아직도 새파란 수줍음을 안고 있었다. 갑자기 꿈 많은 20대의 풋풋한 젖무덤 같았다. 사람들이 저마다의 꿈을 안고 있는 것이 봄이라면,그 꿈의 결실이 지금의 가을인데 우리들은 무슨 꿈을 꾸었고 얼마나 그 꿈을 실현시켰는가? 경사진 왕릉 뒤 언덕에 올라 휘어진 소나무 사이로 젖무덤 능을 끼워 넣어도 보고,또 보고 보고 카메라 셔터를 떨리는 가슴을 안고 눌렀다. 그 능 앞에 있는 나를 지금 찍고 있는 카메라 모습도 아름다웠다. 나는 원래 하던 대로 부산일보 연재 글을 쓰기 위해 현장 찾아,보고,느끼고 있으며,MBC TV에서는 나를 '세상에 감동을 주는 사람'이란 타이틀로 찍고 있는 것이다.

법흥왕 당신은 키가 7자나 되고 너그럽고 후하며 남을 사랑했다고 기록되어 있지요.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많은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하급 신하 이차돈과 합작품으로 불교를 공인했지요. 그리고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김유신 장군을 얻었지요. 즉 당신 재위 19년(532)에 금관가야의 마지막 김구해왕(구형왕)이 왕비,노비,세 왕자와 함께 국고의 보물을 갖고 와 항복을 했지요. 이에 당신은 예로써 그들을 대우하고 벼슬을 주었지요. 특히 막내인 셋째 아들 무력에게는 각간(지금의 장관 정도)의 지위를 주어 그 손자인 김유신을 신라의 장군으로 성장하게 하는 인연의 끈을 맺어주었지요. 또 당신은 여인 복이 많아 여러 여인들을 사랑했지요. 성군으로 추앙받던 70여 세의 21대 소지왕은 16세의 절세미인 벽화를 후비로 삼았는데 그 벽화를 다시 당신 부인으로 삼았지요. 당신의 기골이 장대한 것은 아버지 지철로왕(지증왕)이 너무 긴 음경 때문에 합궁할 여인을 못 찾고 있다가 7척의 당신보다 더 키가 컸으며 북 만한 큰 똥을 누었다는 어머니 연제부인을 왕비로 삼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당신은 죽어서도 외갓집 모량의 지척에 누웠나요. 나는 다시 당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목숨을 바친 이차돈의 목을 칠 때 그 목이 허공에 날아 떨어졌다는 자추사(지금의 백률사)로 갑니다.

# 댓잎은 슬픔을 머금고

지난 주에 답사했던 굴불사를 지나 백률사 입구에 오르자 그때 만났던 스님을 또 만났다. 설악산 봉정암에 있는데 여기 백률사에 기도하러 왔단다. 굴불사지 사면석불을 지나 오르면 길이 세 갈래 나 있다. 중간 돌계단 길을 올랐다. 더 오르면 절 입구에 다다르지만 왼쪽 대숲길이 좋아 이 길을 택했다. 좌우로 빽빽하게 줄지어 뻗어 있는 대나무들의 숲은 맑은 마음,곧은 심성을 전해준다. 선선한 침묵을 울리던 대숲은 나에게 어리광을 부리듯이 잔뜩 머금었던 그리운 비 눈물을 바람에 의지해 쏟아 내었다. 대 줄기 곳곳에 사랑한다는 낙서는 왜 그리 많은지….

절 마당에는 신라시대 석물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참 맑게 생긴 스님과 짧게 대화했다. 절 주위에 적당하게 생긴 바위들이 예술적 감흥을 솟구치게 한다. 삼국유사에 써놓은 대로 관세음보살의 발자국이라고 하여 바위 위의 자국을 만지면 큰 복을 받는다는 그 발자국은 아직도 그대로인데 불국사의 아미타불,비로자나불과 함께 현존하는 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꼽히는 금동약사여래상은 경주박물관으로 옮겨가 이곳 백률사에 지금은 없다.

절 뒤를 올랐다. 절을 내려다보는 맛도 좋았고 바위 하나하나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나뭇잎들도 제 몸에 겨워 부는 바람에 떨어져 허공에 흩어진다. 신라는 동서남북 사방의 산을 신성시하여 나라의 안녕과 복을 빌었다. 신라 사람들은 수도 서라벌의 경우,황룡사를 중심으로 잡고 토함산을 동악,선도산을 서악,남산을 남악,여기 금강산을 북악으로 삼았고 넓게는 팔공산을 중악,동으로는 더 이상 뻗어나갈 수가 없으니 다시 토함산을 동악,백제 세력을 의식하여 계룡산을 서악,지리산을 남악,북방 고구려 세력을 의식하여 태백산을 북악으로 삼았다. 그중 해발 280m의 가장 낮은 이 금강산은 격에서는 다른 산들에 밀리지만 불법을 세운 상징성으로 인해 어느 곳 못지않은 신성한 산이다. 그러나 지금은 단 1초도 쉬지 않는 차 소음 때문에 매력이 떨어진다.

묘청의 서경 천도파로 숙적 김부식에게 피살된 고려 최고의 서정시인 정지상(?~1135)도 여기 어디쯤에서 '고목에 안개는 자욱하고 일만호를 아련히 가렸구나// 흰 구름 날아 동산에 이르고 푸른 물은 달려…'라고 감회 어린 시 '백률사'를 남겼지만 900여 년 뒤의 나는 빌딩 숲과 소음 속에 묻혀 있어 슬픔만 느껴지니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흰 구름과 서산에 붉음을 토하는 저녁노을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출처 : 여행, 바람처럼 흐르다
글쓴이 : 무심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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